[야구 칼럼] ‘타점 수저론’을 극복하기 위하여 - RE24
카테고리: Baseball
야구에서 만루홈런만큼 짜릿한 순간은 드물다. 흔치않은 광경이기도 하며, 스윙 하나로 무려 4점을 얻어가는, 그야말로 일망타진이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랜드슬램의 낭만을 잠깐 덮어놓을 시간이다. 이 글은 다소 삐딱한 시선을 요한다. 만약 선행주자가 아무도 없었다면 평범한 솔로홈런이었을 것이, ‘우연찮게 앞선 주자들이 잘 출루해준 덕에’ 만루홈런이란 결과로 이어진 거 아닌가? 즉, 타자는 운좋게 일확천금을 거두어간 것 아닐까?
이러한 시선으로 바라봤을 때, 만루홈런을 친 타자의 타점 4점이 오로지 본인 스스로가 일궈낸 가치라고 보긴 어렵다. 그 4점엔 앞선 주자들의 몫도 분명 포함되어 있으리란 말이다. 이는 타점이란 스탯이 그리 공정한 스탯은 아니라는 것을 방증한다. 야구판 ‘타점 수저론’이나 다름 없다.
타점은 다소 클래식한 스탯이니 차치하고, 더 테크니컬한 스탯을 보자. 현존하는 스탯 중 타자의 능력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스탯이 WRC(조정 득점 창출력)이라고들 얘기한다. 하지만 WRC는 wOBA(가중 출루율)을 기반으로 만든 스탯이라 1점 홈런과 4점 홈런을 같은 가치로 인식한다.
- wOBA = (0.691×(볼넷-고의4구) + 0.722×몸에 맞는 볼 + 0.884×1루타 + 1.257×2루타 + 1.593×3루타 + 2.058×홈런) / (타수 + 볼넷 - 고의4구 + 희생플라이 + 몸에 맞는 볼)
두 스탯이 양 극단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가? 타점은 주자의 공로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타자에게만 그 공을 돌리는 반면, WRC는 타자의 클러치 능력을 쳐주지 않고 그랜드슬램을 솔로홈런과 같은 취급해버린다.
자, 그러니까 상황은 이렇다. 야구민주주의공화국이란 가상의 국가가 있다. 이곳의 대통령 야잘알 씨는 국민들의 성토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다. 어떤 불만인고 들여다보니, 때마침 본인 앞에 주자가 셋이나 나가 만루홈런을 친 사람들은 같은 홈런임에도 불구하고 솔로홈런을 친 사람보다 타점을 4배나 가져가는 상황이 무척이나 불공정하단다. 그렇다고 만루홈런을 친 이들의 타점을 앗아가자니 그건 말이 안된다. 역차별이라며 반기를 들고 일어설 것이다. 또한, 앞서 득점한 주자들의 공로를 어떤 식으로 보상해줄지도 눈여겨봐야 할 문제다. 야잘알 대통령은 아주 고민이 많다.
그럼 이 두 스탯의 중용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까? 불가능했다면 글은 시작되지도 않았다. RE24(Run Expentancy24)라는 스탯이 그 해답이다. 이 스탯은 만루홈런을 친 타자에게 타점 4점만큼 후하게 공적을 치하하지 않는다. 대신 만루홈런에 음의 가중치를 매겨, 4점보다는 낮은 가치를 매긴다. 이 때 낮아진만큼의 가치를 주자들에게 부여한다. 나름의 공정성을 확보한 획기적 스탯인 것이다. 야구민주주의공화국이란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것은 단순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 야구에서도 공정이란 정치적, 사회적 프로세스를 적용해보자는 것이다. 우린 이 상황을 타점 수저론이라 일컫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RE24를 알아보기 위해선 RE(Run Expectancy, 기대득점)이란 개념을 알아야 한다.
출처: 엔씨소프트
기대득점은 야구에서 벌어지는 24가지 상황 각각에서 몇 점을 창출해낼 것으로 기대되는지를 알려준다.
자, 무사 1루의 상황에서 타자가 중전안타를 치고 출루하여 무사 1,2루를 만들었다고 가정하자. 이 때 기대득점은 0.95에서 1.59로 상승하였으므로 타자는 +0.64만큼 기여했다. 이렇게 타자가 만든 기대득점 변화량을 REA(Run Expectancy Added)라고 한다. 이 타자는 다음 타석에서 선두타자로 들어서서 땅볼아웃으로 물러났다. 이 경우엔 REA가 -0.26이다. 두 REA를 합하면 0.38이 나오는데, 이런 식으로 한 시즌동안 REA를 총합산한 것이 바로 그 선수의 RE24이다. 아래는 2021시즌 RE24 상위 7인이다.
순위 | 이름 | RE24 |
---|---|---|
1 | 강백호 | 63.17 |
2 | 이정후 | 46.75 |
3 | 양의지 | 46.56 |
4 | 전준우 | 45.66 |
5 | 추신수 | 43.5 |
6 | 김재환 | 40.57 |
7 | 홍창기 | 40.13 |
이제 앞서 논한 만루홈런의 가치 삭감을 자세히 알아볼 때다. RE24를 계산할 때에는 상황마다 홈런의 REA가 다르다. 아래 표를 보자.
0 out | 1 out | 2 out | |
---|---|---|---|
주자 X | 1.000 | 1.000 | 1.000 |
1루 | 1.644 | 1.732 | 1.868 |
2루 | 1.286 | 1.553 | 1.761 |
3루 | 1.056 | 1.236 | 1.715 |
1,2루 | 1.967 | 2.312 | 2.632 |
1,3루 | 1.678 | 2.065 | 2.577 |
2,3루 | 1.549 | 1.835 | 2.485 |
만루 | 2.114 | 2.643 | 3.282 |
주자가 없을 때의 홈런, 즉 솔로홈런은 타점1점만큼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한다. 그러나 루상에 주자가 나가있는 경우엔 본래 획득하는 타점보다 더 낮은 가치를 지닌다.
무사보단 1사일 때, 1사보단 2사일 때 REA가 더 높다. 아웃카운트가 많을수록 수세에 몰린 상황이니, 이 경우에 친 홈런을 더 높게 쳐주는 것이다.
주자가 3루에 있을 때보단 1루에 있을 때의 REA가 더 낮다. 주자를 불러들이기 어려운 순간일수록 더 높은 REA를 부여하는 것이다.
무사 만루에서 홈런을 쳤다고 가정하자. 이 때 타자가 얻어가는 타점은 4점이지만, REA는 2.114이다. 그럼 나머지 1.886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앞서도 말했지만, 루상에 출루한 주자들에게 남은 REA가 지급된다.
RE24는 이처럼 주어진 상황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스탯이다. 한 경기의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어느 선수가 적절한 순간에서 가장 알토란 같은 활약을 했는지 평가하는 데에는 좋은 스탯이다.
그러나 ‘상황을 반영한다’는 특성은 양날의 검이라, 단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선수의 능력을 예측하기 위해선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배제하여 ‘상황 중립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좋다. 극단적인 예시로, 홈런 20개를 친 선수와 홈런 15개를 친 선수가 있다고 가정하자. 전자의 선수는 무사 3루에서만 홈런을 쳤고, 후자 선수는 2사 1루에서만 홈런을 쳤다고 하면, 후자의 RE24가 더 높을 것이다. 이렇게 ‘상황을 개입’시키면 홈런을 5개나 더 친 객관적인 파워가 묵살당하고 마는 것이다.
수저계급론에 대항하여 과도한 역차별 정책을 펴는 것은 타당한 조치가 아닌 것처럼, 타자에게 주어진 상황이 유리했다고 하여 그 타자의 공로마저 애써 깎아내릴 필욘 없다. RE24스탯이 그릇된 스탯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다만, RE24의 본 의미를 확실히 알고, 적재적소에 적용할 줄 아는 인사이트가 필요하다는 말이다.